남의 집 식물은 왜 더 예뻐 보일까요

다육이를 잘 키우지 못했던 제가 다른 집의 작은 다육이들을 보고 부러웠던 이유. 내 식물을 돌보는 눈과 남의 식물을 구경하는 눈의 차이를 이야기합니다.

다육이를 잘 키우는 집에 갔다가 한참 동안 화분을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작은 다육이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는데, 잎의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초록빛이 짙은 것도 있고 붉은빛을 띠는 것도 있었습니다. 한 화분씩 따로 보아도 예뻤겠지만, 여러 종류가 모여 있으니 색과 모양의 차이가 더 또렷했습니다. 작은 식물들이 모여 만든 풍경이 이렇게 다채로울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다육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육이를 잘 키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집의 다육이들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키웠을까. 예쁘다는 감탄 뒤에는 부러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제게 다육이는 어려운 식물이었습니다

예전에 다육이를 키운 적이 있습니다. 물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고 햇볕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른 식물보다 손이 덜 갈 것 같았고, 크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창가에 두고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자주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셈입니다.

그러다 상태가 나빠졌고 결국 죽이고 말았습니다. 원인이 물이었는지, 빛이었는지, 다른 문제였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그때는 식물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살펴본 기억보다, 창가에 두면 괜찮을 거라고 믿었던 기억이 더 선명합니다.

그 뒤로 다육이는 제게 어려운 식물이 됐습니다. 다른 식물에 대해서는 조금씩 익숙해져도 다육이를 떠올리면 먼저 실패한 기억이 따라왔습니다. 작고 단정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도 쉽게 다시 키워보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예쁜 식물이라는 인상보다 잘 키우지 못했던 식물이라는 인상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제가 본 것은 잘 자란 지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는 그런 기억이 잠시 뒤로 밀렸습니다. 눈앞에 있는 다육이들은 제가 떠올리던 실패한 화분과 달랐습니다. 빽빽하게 모인 작은 잎, 서로 다른 색, 화분마다 다른 생김새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다육이가 이렇게 예뻤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그 모습을 떠올리다가 한 가지 차이를 깨달았습니다. 제 다육이를 생각하면 창가에 두었던 일, 제대로 살피지 않았던 일, 끝내 죽었던 순간이 차례로 따라옵니다. 반면 그 집의 다육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잘 자란 잎과 색입니다.

내 식물은 키워온 과정까지 알고 있지만, 남의 집 식물은 눈앞에 보이는 모습부터 보게 되는 겁니다.

그 집 주인이 다육이를 키우며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내 화분을 볼 때는 돌보는 사람의 눈이 되고, 남의 화분을 볼 때는 구경하는 사람의 눈이 됩니다. 같은 식물이라도 바라보는 입장이 다르면 눈에 들어오는 것도 달라집니다.

그래도 부러운 건 부러운 겁니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부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날 본 다육이들은 정말 예뻤고, 저는 여전히 다육이를 잘 키우는 사람이 신기합니다. 누군가의 화분을 보고 감탄하는 마음까지 애써 줄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부러움이 곧바로 제 식물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질 이유도 없습니다. 제가 키웠던 다육이와 그 집에서 본 다육이는 같은 출발선에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차이를 생각하면 남의 집 화분이 유난히 근사해 보였던 마음도 조금 이해됩니다.

언젠가 다시 다육이를 키울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다육이를 떠올릴 때마다 죽였던 화분만 생각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밀조밀 모여 있던 작은 잎들과 초록빛, 붉은빛이 어우러진 모습도 함께 떠오릅니다. 잘 키우지 못했던 식물인데도, 남의 집에서 다시 그 아름다움을 발견한 셈입니다.